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만든 '마태오 수난곡'이 있다. 마태 수난곡 중 "Erbarme dich, mein Gott"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느님)은 바흐 음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아리아로 꼽힌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뒤, 밖으로 나가 뼈저리게 통곡하는 장면 직후에 흐르는 곡이다. 구슬픈 바이올린의 독주 선율이 마치 베드로의 눈물처럼 흐르고, 알토(혹은 카운터테너)의 목소리가 인간의 연약함과 참회를 노래한다. "저의 하느님, 제 눈물을 보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아프게 통곡하는/ 저의 이 심장과 이 눈을 보소서, 하느님./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단순한 슬픔을 넘어, 자신의 잘못을 마주한 인간이 신의 자비를 간구하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성지주일에는 두 개의 복음 말씀이 있다. 많은 인파의 환호 속에 영광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놀랍게도 변심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간 내용의 복음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반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아진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개선 행렬이기보다는 십자가 죽음의 전주곡이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하던 같은 군중들은 어느새, 바라빠를 놓아주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낸다.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크게 환영하고 박수를 치던 예루살렘 군중은 마음속으로는 다들 세속적인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통치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에게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것을 기대하며 환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라고 외치는 승리의 노래가 조만간 저주와 악담, 고발과 십자가 처형으로 뒤바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위대한 승리자가 타는 건장한 말이 아니라, 작고 왜소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이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당신의 길, 십자가 수난의 길, 죽음으로써만 가능한 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다. 예수님의 죽음을 즐기는 무리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서럽게 목 놓아 우는 사람들, 생사고락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등진 제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길은 오늘도 계속된다. 모든 사람은 이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한다. 무거운 십자가를 나눠서 지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도 있다. 못질을 하기 위해 망치를 들고 함께 하는 사람도 있다. 남이야 십자가를 지든 말든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도 있다. 십자가 옆에 있다가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가능한 한 예수님의 고통과 절망의 어두움을 강조한다. 마태오는 예수님께 고통을 주는 사건만으로 수난사화를 통일하고 있다. 그 수난사화에 등장해서 예수님을 짓누르는 사람들의 악의에 관해서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철저하고 깊다. 유다는 대사제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는 유다의 악의가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급하니깐 예수님을 거부해 버린다. 생존본능 때문에 사랑하는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의리가 없음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대사제들과 장로들의 고약한 심보도 마태오에서는 유난히 두드러진다. 예수님을 판 대가로 은화를 받았던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돈을 돌려주려고 찾아갔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쫓아버리기도 하고, 뒤에서 군중을 선동한다. 권력과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랄한 짓도 서슴지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서, 무력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 감각을 가진 빌라도와 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군중이 더욱 한통속이다.
이렇게 마태오의 수난사화에서는 인간의 추한 욕망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상처받고, 고통에 짓눌려,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된다. 상처받고, 고통에 짓눌려 있는 예수님을 그 누구도 위로하거나 도와주려는 자가 없다. 예수님은 고통과 고독의 어두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시며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움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체험하시며 외치신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상처받으시고, 배신당하시고, 버림받으시며, 하느님으로 부터 한 치의 도움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경멸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신다.
고통과 희망은 한 몸으로 엮여 있다. 그래서 고통 없이는 참 희망이 없으며, 희망 없이는 어떤 고통도 이겨 낼 수 없다. 이 거룩한 주간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희망”(콜로 1,27)이 되셨음을 묵상해야 한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계속된 예수님의 겸손, 아래로의 행보가 돋보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