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15일 사순 제 4 주일 Fr. 김두진(바오로)강론

 

3 15일 사순 제 4 주일

화려한 조명이 도시를 밝히고 모두가 ''을 노래할 때, 역설적으로 그 불빛에 가려진 어둠은 더 깊어지곤 한다. 오늘 복음의 배경인 초막절이 그랬다. 광야의 불기둥을 기념하며 예루살렘 전체가 등불로 넘쳐나던 그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성전 밖 어둠 속에 소외된 사람 하나에게 시선을 멈추신다.

 

기적이 일어난 날은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은 길에서 소경을 만나시는데 이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었다.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소경은 무슨 죄로 이렇게 되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그를 불러세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라지신다. 예수님이 태생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행위는 단순한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흙으로 인간을 만드셨던 창세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재창조'의 사건이다. 주님은 당신의 성령()과 흙으로 그를 다시 빚으셨다. 그는 '파견된 이'라는 뜻의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순종한다. 눈을 뜬 것은 연못물의 효능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에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타인의 고정관념이나 막연한 두려움이라는 안대를 벗고, 사실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님(주님이 구원하신다)이라고 부르게 된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난 후의 풍경은 기괴하다. 사람들은 한 인간이 빛을 찾은 기쁨에 동참하기보다 "누가, 언제, 어떤 자격으로" 이 일을 했는지 따지느라 바쁘다. 사실 예수님은 진흙만 개어주셨을 뿐, 실제로 실로암까지 걸어가 씻는 '노동'을 한 것은 정작 소경 본인이다. 죄를 따지려든다면 소경을 탓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타깃은 오직 예수님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이미 '예수는 죄인'이라는 답을 정해두었다. 그들에게 기적은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논리를 위협하는 '불편한 사건'일 뿐이었다. 결국 기적의 주인공은 다시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정답을 지키기 위해 기적조차 죄로 왜곡하는 인간의 시기심이 한 사람의 기쁨을 슬픈 사건으로 변질시킨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건 '진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논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을 우롱하고 또 서로를 비난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습, 혹은 SNS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소위 댓글은 예나 지금이나 과히 틀리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공동체에서 쫓겨난 이 사람은 고립되었지만, 오히려 그 시련 속에서 그의 신앙은 선명해진다. 처음엔 그저 "예수라는 분"이라 말하던 그는, 박해를 겪으며 "예언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을 거쳐 마침내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주님! (Kyrios)"이라 고백하며 빛으로 나아간다. 반면, 성경을 달달 외우고 율법을 수호한다는 바리사이들은 지독한 어둠 속에 갇힌다. 그들은 기적의 사실(Fact)보다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빛을 피해 어둠으로 숨어버렸고, '예수는 죄인이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린 채 스스로를 단죄한다. 예수님이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었겠지만, 본다고 하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신이유다.

 

행여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성경 지식'이나 '나의 옳음'이라는 화려한 등불 아래 숨어, 정작 내 곁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랑의 기적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만든 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의 진심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이기심과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하루, 세상을 분석하고 판단하려는 '잘난 눈'을 잠시 감아보고 대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을 뜨는 우리였으면 한다. 1독서의 말씀처럼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신다." 우리는 화려한 초막절의 등불(세속적 성공, 지식, 권위) 아래서 정작 옆에 있는 형제의 아픔과 주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앙이란 내가 체험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세상이 우리를 '회당에서 쫓아내듯' 비난하고 박해할지라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용기 있게 증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된다.

 

나는 세상의 편견과 나의 고집이라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지, 아니면 실로암의 맑은 물 (파견된 자의 말씀)에 눈을 씻고 주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제자인지 묵상하는 주일이었으면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려 들기보다 차라리 느끼려 노력하고 누군가의 성공에 배 아파하기보다 함께 기뻐하는 우리였으면 한다. '내 눈이 정확하다'는 오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실로암의 (파견된 이의 말씀) 맑은 물이 우리 마음의 눈을 씻어줄 것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겸손함이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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