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9일 부활 제 3 주일 김두진(바오로)신부님 강론
많은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는다. 성서에는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곳, 약 11km 떨어진 지점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정확한 장소는 성서학자들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 엠마오란 실망과 좌절을 안고 떠나가는 곳임이 분명하다. 제자들도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접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길, 그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던 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엠마오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에서 인생의 결론을 자신이 내리지 못하고 가는 사람의 길이라도 한다. 또한, 지난날 삶의 상념 속에 빠져 함께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길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나 '엠마오'가 있다. 공들여 쌓아온 탑이 무너졌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혹은 꿈꿨던 미래가 산산조각 났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희망의 중심지)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한다. 엠마오는 '실망과 좌절을 안고 떠나는 도피처'이자, '인생의 결론을 내버린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그랬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꿀 줄 알았는데, 힘없이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들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각자의 삶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옆에서 함께 걷는데도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눈이 가려졌다는 건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절망이라는 필터가 끼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분이 살아나겠어?"라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눈앞의 기적을 가로막았다. 이게 예수님은 답답해하신다. "왜 이렇게 마음이 굼뜨냐!"고 하신다.
우리는 때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슬픔에 잠기면 바로 옆의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된’ 것은 그들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께서 이뤄주신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서서히 열리면서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렇게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었던 성경 말씀과 그 안에 역사하신 성령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말씀 속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풀어 주심을 통해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령을 온전히 자신의 삶 속에 모시지 못한다면 그냥 한순간의 타오름으로 끝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엠마오의 조촐한 식탁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에 두 제자가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길을 더 가려는 예수님을 청해 저녁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 함께 머물러 주시기를 간곡히 청하였고,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눠 주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마음이 뛸 듯이 기뻤다. 오는 길에서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고 감동적이었던 이유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엠마오로 갈 때는 환한 대낮이었지만 마음은 암흑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한밤중이었음에도 마음은 광명이었다. 상황은 변한 게 없다. 예수님은 여전히 눈앞에서 사라지셨고 밤은 깊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눈'이 열리자 절망의 길은 소명의 길로 바뀐다. 부활은 기적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해석하는 눈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지만, 성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현존케 한다. 그래서 성찬례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이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현존하신다는 가장 큰 표징이 된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으심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기념한다. 따라서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교회 공동체와 함께 머무르시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는 말씀과 성찬례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성경은 그들의 무뎌진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성찬례는 그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없애 주었다. 성경 말씀들이 부활 사건에 비추어 풀이되고, 성찬의 식사가 거행될 때,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거룩한 일들은 이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귀한 몸인 성체는 오늘도 나눠지고 쪼개어져 우리 손으로 전해진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그 옛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친히 빵을 떼어 나눠주신다 생각하고, 지극히 정성스런 몸과 마음으로 영성체에 임하는 우리였으면 한다. 우리는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신다. 믿음 없이 모시는 성체는 그저 '맛없고 배부르지도 않은 조그만 밀떡'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를 위해 쪼개진 사랑이다"라는 확신으로 모실 때, 그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음식이 된다. 성경(말씀)이 우리 마음에 불을 지핀다면, 성체성사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절망의 발걸음을 돌려 희망의 예루살렘으로 뛰어가는 순간, 지금 이루어지는 우리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