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른들의 심부름을 기억하시는가?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자주 부르시곤 했다. 부르시는 목적은 그만 놀고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호통(?)도 있고 나머지는 심부름이었다. 심부름의 종류도 다양했다. 신 나게 노래 부르며 하는 심부름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구시렁거리며 하는 심부름도 꽤 있었다. 당연히 대가도 없었다. 부모님을 도와드렸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꾀를 부려 못 들은 척하거나 숨어 있다가 혼이 나고 기분도 엉망인 경우도 있었다. 수고했다며 맛있는 간식이나 심지어 용돈이라도 받게 되면 그 기분 최고였다. 사실 우리는 부르심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일상이 부르심과 응답의 연속이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부른다. 상대를 부를 때는 무엇인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기에 가끔 그냥 불렀다는 이들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은 어떨까.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을 그분의 자녀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분명 부름과 응답이 오간다. 다만 문제는, 그 부르심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느냐는 것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때로 아주 조용해서,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 속에서는 쉽게 묻혀버린다. 그래서 신앙은 어쩌면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아무 의미 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부르심 안에는 각자를 향한 분명한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사제의 길, 수도자의 길, 혼인의 길처럼 여러 이름으로 나누어 부르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불렸는가?”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감각’이다. 신앙의 감각, 다시 말해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귀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어떤 이는 마음이 움직이고, 어떤 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 차이는 지식이 아니라 감각에서 온다.
그 감각을 길러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또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착한 목자가 예수님의 문으로 드나든다는 말은 1·2독서에서 사도행전과 베드로가 이야기하듯이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며,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며 청빈하고, 정결하며,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착한 목자로 사는 것이다. 양들 역시 그 문으로 드나들도록 한다는 말은 양들도 착한 목자를 본받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며,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만나고 증언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말이다. 예수님이라는 문으로 드나들지 않는 이들은 목자가 아니라,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또한 착한 목자들을 따라서 예수님이라는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이들 또한 예수님의 양 떼가 아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도, 위험한 순간에도 결국은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에 이르게 된다. 이 단순한 비유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그만큼 길을 잃기 쉬운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럴듯한 말, 달콤한 약속,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선택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른다. 그래서 진짜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식별의 감각인지도 모른다.
성소주일은 바로 그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날이다. 특별히 사제나 수도자 같은 ‘특별한 부르심’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이가 불림을 받았다는 더 근본적인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그 길을 앞서 걸어가 주기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군가는 씨를 뿌리고, 누군가는 돌보고, 누군가는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그 단순한 순환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삶 속에서 자라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새로운 부르심이 태어나기를. 그리고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지치지 않기를.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성소는 어디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희생과 기도, 그리고 작은 응답들이 모여 한 사람의 길을 만든다. 결국 성소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길러지는 생명과도 같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은 이것일지 모른다. 잠시 멈추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조용히 대답해 보는 것이다.
”네,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