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하루살이 )
어느새 엄동이 떠나가고 따스한 볓이 창가에 들자
날파리같은 벌레가 날아들어 눈앞을 어지러이 넘나들더니 자꾸만 내 얼굴에 달라붙어 여기저기 깨물었다.
손을 저어 날려보내자 곧 다시 찾아와 또 깨문다.
몹씨 구찮어졌다.
가만히 기회를 엿보다가 손바닥으로 탁 하고 치니 억 하는 소리조차 없이 그 하루살이는 그렇게 죽어갔다.
그 하루살이가 살아있을 적에도 나를 구찮게 하며 신경을 거스르더니
죽은 하루살이가 내마음을 그리 편치않게 한다.
하필이면 왜,
산에 올라 정좌 ( 正座 )하고 수양을 쌓는, 그리고 뭇생명을 아끼는 불자 ( 佛子 )도 못되는
나같은 사람 곁으로 찾아왔다가 그런 참혹한 변을 당한단 말인가.
까짓 작은 밀알만도 안되게 작은 미물이 조금 구찮게 했다고 손바닥으로 단칼에 치듯 ,살자고 왔던 작은 생명을
앗아버리다니 나는 이제 절간이 있는 언덕근처에도 얼씬하지 말아야 할까보다.
내마음을 편하게하려니 이제 나의 행위를 합리화 해야겠다.
하루살이는 어차피 하루만 살도록 허락받아 태어났엇으니 나한테 걸려들지 않았더라도
오늘을 넘겨 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름이 하루살이겠지.
내가 그의 갈 시간을 조금 앞당겨주었을 뿐이야.
그렇게 자위하는 생각을 하고나니 결국
나는 마치 안락사를 도와주던 악독의사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창조주의 고귀한 뜻을 비하 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지만
사람인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루살이) 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확실한 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인, 오늘만을 허락이 보장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테니.
오늘이 지난 내일을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내자신도 또 누구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나는 그 하루살이처럼 어슬렁거려 이웃의 방해물이 되기보다는
나를 필요로 할 이웃을 찾아 벗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 컴퓨터 바이러스 )
그 이름 서부터 벌써 바이러스 ( Virus ) 라고 지어져서 찾아오기도 전에 이미 겁먹게 하는 그자들이
나의 컴퓨터를 쳐들어오는 그날엔,
기계인 컴퓨터만 몸살을 앓는 게 아니다.
그 기계를 써야하는 나도 몸살에 시달리게된다.
어쩌면
나 혼자만 앓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기계야 허긴 뭔 상관이겠나.
균이 들어오면 그냥 앓으면서 일을 안하면 되고 주인이 의사를 부르거나 약을 먹여 고쳐주면 또
시치미 뚝 떼고는 다시 일을 시작해주면 되는 거지.
속상하고 아픈 건 정작 나야.
필요하니까.
그런데,
바이러스라고 하는 그것들도 그냥 고장만 내고 그것으로 끝 내고 말면 그래도 참아줄 수 있을지 모른다.
바이러스의 할 일이란 게 그거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 광고를 보라.
” 지금 너의 컴퓨터를 바이러스가 침입해서 작동도 잘 안되고 우선 속도가 매우 느리다.
맞지요 ?
우리가 특효약을 개발해 놓았으니 클릭하시오. 이 약을 한방만 먹이면 만사는 형통이될 꺼요. 사시오. “
그래서 우선 마음이 급해져서 그걸 산다면 조금 있다가 ” 그건 구식이고 약하니 또 새것으로 바꾸시오. 아니면… “
그 알약을 파는 그자들이 바로 바이러스의 장본인이란는 걸 알게된 건 한참이나 속 썩이고 세월을 보낸 다음이였지.
병 주고 다음에 약 팔고 안사면 사탕 주며 꼬시고… 그래도 안산다면 정말 맛 좀 봐라. 그런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원수이며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밤과 낮이 없이 꼬시고 유혹하는 사탄의 수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공동체의 삶 안에서 이웃에게 바이러스일까, 알약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면서 매사에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무덤덤한 하드웨어일까 ?
외출하기 위해 얼굴 닦으러 거울앞에 가서 들여다 보아야지.
세수를 하고나서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래도 닦았으니 조금은 덜 더러운 것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있는 진짜 나는 당체 그 정체를 잘 들어내지 않으려 숨어있다.
그러니,
” I am not so sure what I am. You are going to be judge. Tell me what I am. “
( Weed country )
파아란 잔디에 어쩌다 어디서 날아와 이사 온 잡초(Weed)가 하나 보이게되면
다음날엔 둘, 그리고 곧 셋, 넷…으로 번지는 일은 일도 아니게 빠르고 쉽다.
그래도 바뻐서 잠시 더 놔두면 이젠 잡초가 반, 잔디반 그렇게 되고 어느새 잡초가 주인노릇 하는 꼴을 보게된다.
내 눈에도 보기싫고 짜증나겠지만 이웃의 눈총이 만만치 않다.
곧 그들의 잔디를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뻐서 좀 더 지난다면 동네에서 축출대상 1호로 몰릴지도 모른다.
우선 급하다고 화초를 다듬는 조그만 손삽을 들고 나가 열심히 파내어 버리고 들어와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면 기절할만큼 다시 잔디를 덮고있는 WEED 를 보게될 것이다.
” 날 우습게 보았느냐 ? “는듯 Weed 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것이다.
과연 잡초는 잔디밭 주인의 화를 돋구고 끈질기게 솟아 살아가는 근성을 갖고 있다.
영적으로 하느님의 잔디밭을 좀 먹고 그 밭의 포도나무가지인 신앙인들을 기회만 엿보며 야금야금 쳐들어간다.
그래서 화가 난 농부의 일꾼들이 ” 저 못된 것들을 다 뽑아 불살라 버릴까요 ? “
주인께 묻지만 주인은 ” 추수하는 그날까지 내버려두어라.
그 엉겅퀴를 뽑으려다 자칫 알곡마저 상할까 염려한다. ” 만류하신다.
우리네 집앞의 잡초는 그 지독한 근성을 이기는 약 앞에서는 도리없이 물러가게된다.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유혹하며 찾아드는 그 잡초같은 미혹의 악령들을 이기고 물리치는 비법은
그 유혹보다도 더 진실되고 진솔한 나의 기도로 무장하며 나의 밭을 지켜주시는 농부의 곁에 가까이 머무는 그 길
밖에 없을 것이다.
좋게 보아주어서
잔디가 반, 잡초가 반인
내 마음안의 잡초를 물리칠 알약은 어디에서 구할수 있을까 ?
우리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피폐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이 되어 잠자리를 찾게되는 그 시각까지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리고 어디를 보아도 그곳엔
바이러스가, 잡초가 우리를 가로막아 위협하고 있는 환경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최악의 환경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에게서 만들어졌을까 ?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자신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느님은 젓꿀이 흐르고 파아란 풀밭에 온갖 과일이 풍성한 아름다운 동산에
당신의 모상을 닮은 나를 낳아주셨건만
그것을 이렇게 망쳐놓고 피폐하도록 훼손한 자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구의 자연환경을 보라.
시멘트로 흙을 덮어 멋있게 살 곳을 짓는다며 ,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그래서
지구온난화, 산불, 태풍, 홍수가 시도 때도없이 우리를 공격하며 몰려온다.
편하고 빠르고 잘사는 곳을 만든다며 과학은 온갖 것들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재주를 뽐내지만
그 과학이 역설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불편과 부당함과 부정함은 또 얼마나 많은가.
편하고 빠르다는 게 좋기만 한 것일까.
전에 걷고 뻐스를 가끔 얻어 타고 그래서 불편한 생활을 했지만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은 살아있었고
서로에게 열려있었다.
그땐
기계가 아닌 사람이 사는 세상 같았다.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가장 두렵게 그래서 가장 염려하게하는 일은
(사람) 이 (사람)을 사람이 만든 과학보다도, 그 과학이 만든 물건들보다도 더 낮게 내려놓아 옅잡아보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업수이 여기고 깔보며 그래서 상처를 주고 파괴하고 죽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자기가 설 자리를 스스로 없애며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흉계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것을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염려되는 것이다.
물론 끝날에 하느님께서는 그 흉계와 사탄을 이겨 물리치실 것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군대가 되어 그 흉계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과학이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삶은 사람이 사는 일이다.
이제라도 더 늦기전에
사람이 신앙의 원초로 되돌아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을 쳤으면하고 바라는 마음이다.